
색을 고르는 일은 늘 조용한 대화 같다. 어느 날, 작업실 책상 위에 무심히 올려둔 남색 원단 조각이 아침 햇빛을 받아 묘하게 붉어 보이던 순간이 있었다. 그때 ‘아, 이 온도가 바로 내가 찾던 무드였구나’ 하는 생각이 스쳤다. 디자인을 오래 해오면서도 여전히 예상치 못한 순간에 색이 먼저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. 그때의 감각은 화면 속 RGB 숫자로 치환되지 않고, 손에 닿는 공기처럼 더 생생하게 남는다.
최근 브랜드 아이덴티티 작업을 하면서 색이 가져오는 서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. 어떤 브랜드는 단단한 회색이 말이 되고, 또 다른 브랜드는 부드러운 크림 톤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들의 성격이 느껴진다. 예전에는 단순히 ‘트렌디한 팔레트’를 찾는 데 집중했다면, 지금은 색이 전달하는 기분, 사용자의 하루에 스며드는 방식 같은 더 미묘한 층위를 보게 된다.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가 “너는 색을 고를 때 표정이 바뀌더라”고 농담처럼 말한 것도 떠오른다.
색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면서 공간과 사물에서 얻는 통찰도 깊어졌다. 카페에서 마주한 어두운 월넛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도자기 컵을 본 적이 있다. 그 대비가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을 관찰하게 되었는데, 그때 느낀 건 ‘대비가 만드는 호흡’이었다. 강한 색의 충돌도 매력적이지만, 잔잔한 톤 안에서도 충분히 다이내믹이 생길 수 있다는 걸 다시 배웠다. 이후 진행한 아트워크 작업에서도 그 원리를 녹여보려 했다. 단순한 배경톤을 깔고 그 위에 질감을 덧입히는 방식으로, 색의 숨결을 남기듯 표현하는 식으로.
색 이야기를 하다 보면 늘 소재와 질감의 문제로 이어진다. 시각 디자인은 결국 손끝의 세계이기도 하니까. 아트보드 안에서만 고민하면 보이지 않던 게 실제 질감을 마주하는 순간 선명해지는 경우가 많다. 특히 패브릭 샘플을 손에 쥐는 순간, 화면에서는 느끼지 못한 색의 밀도가 다가온다. 그래서 나는 종종 들고 다니는 작은 스와치북이 있다. 빛 아래에서, 실내에서, 흐린 날과 맑은 날 — 같은 색이 얼마나 다른 표정을 짓는지 지켜보는 건 꽤 유용한 관찰이다.
요즘은 색보다 ‘무드’를 먼저 떠올리는 습관이 생겼다. 단순한 팔레트보다, 어떤 장면을 만들고 싶은지 먼저 마음속에 스케치를 그려보는 식이다. 브랜드를 맡을 때도 우리는 결국 그 브랜드의 목소리를 색으로 번역하는 일을 하는 것이니까. 한 번은 클라이언트가 “이 색 조합을 보고 이유는 모르겠는데 편안하다는 느낌이 든다”고 말한 적이 있다. 그 말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. 논리로 설명할 수 없어도, 감각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.
색은 단순한 꾸밈이 아니라, 태도와 리듬이다. 어떤 날은 짙고 무거운 색을 보고 싶고, 또 어떤 날은 가벼운 파스텔이 더 맞을 때가 있다. 작업하는 사람의 마음 또한 색에 묻어나기 마련이다. 그래서 좋은 디자인은 기술 이전에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. 아무리 차가운 스타일의 브랜드라도, 그 안에 ‘사람의 온도’가 조금은 담겨 있어야 한다.
앞으로도 나는 색과 질감,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좀 더 사람의 언어로 설명해보고 싶다. 디자인이란 결국 삶을 보는 또 하나의 방식이니까. 그리고 그 방식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선이 되고,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붙잡아주는 작은 감정의 조각이 되기도 한다.
색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.
아마도 그게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.
/마현욱 디자이너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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